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생단 사건 (문단 편집) == 민생단이란? == 민생단은 1932년 2월 15일에서 1932년 7월 14일까지 존속한 단체로서 간도 지역의 기존의 민간단체들, 특히 조선인민회로 대표되는 친일 부역자들과 그 외에 [[민족주의]] 운동가 등이 모여 설립하였다. [[박석윤]](朴錫胤)[* [[최남선]]의 매부이자 매일신보 부사장을 지냈다.], [[조병상]](曺秉相)[*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를 지냈다.] 및 김동한(金東漢)[* 한때 공산주의 계열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했지만 이후 변절해 일제 [[스파이|밀정]]으로 활동하였다.], 김택현(金澤鉉), 이경재(李庚在), 이인선(李仁善), 최윤주(崔允周), [[전성호]][* [[청산리 전투]] 참가자로서 연변자치촉진회 활동 중 1928년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해서 3년간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 민생단에 가담하였다. [[http://www.db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477|#]] 광복 후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 12연대장을 맡았다.] 등이 설립에 참여하였다. 10월 7일 룽징(龍井, 용정) 일본 총영사관에 서면으로 설립을 신청하였고 총영사관은 12월 24일 [[조선총독부]]의 훈령에 따라 이를 허가했다. 민생단은 간도 지역 조선인의 생존권 확보, 구체적으로는 조선인 권익 옹호, 조선인 자치를 표방하였으나 막상 설립 후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 정책을 지지하며 친일, 반공 활동을 벌여 지역 대중의 분노를 샀고 중국공산당 조직과 조선인 독립군 등 반일 무장세력은 민생단에 대한 탄압에 들어갔다. 각지에서 민생단 가입자에 대한 살해 위협, 폭행 등이 이어졌고 이는 많은 사람들의 민생단 탈퇴로 이어졌다. 실제로 3월 26일자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민생단 혐의분자 7명이 공산당에 의해 살해된 사건도 벌어졌다. 한편 민생단은 이에 대항해 마을마다 [[자경단|자위단]]을 조직할 것을 계획하고 일본총영사관과 특무기관의 허가를 얻었다. 이어 간도자위단훈련소를 세우고 자위단원 후보들을 뽑아 7월 1일 개소하였으나 간도에서 조선인들이 무장 단체를 갖추고 정치적 조직을 키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일본은 정책을 바꿔 자위단 결성에 반대하고 민생단에도 압력을 가했다. 이에 민생단은 1932년 7월 14일 사무소 폐쇄를 신고하고 자진 해산했다. 간도 자치 얘기는 애초부터 민생단이 중국공산당에게 확실하게 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간도 지역은 중국 영토에 속하지만 조선인이 이미 인구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동북지방 군벌 정부의 부실한 행정으로 인해 만주 지역의 안정성도 흔들리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여 그 일대가 완전히 정치적, 행정적 진공 상태에 빠진 상황에 조선인 자치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중국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또 하나의 도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민생단은 2월 18일에 갓 세워진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당국을 대상으로 조선인 특별자치구 설정 청원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조선인을 만주 지역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만주족과 중국인의 기득권을 뺏을 목적으로 이용했다[* 출처: 윤욱 (2017). 中華民國 國民과 滿洲族 사이. 역사학보, 234, 265-30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